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군의 전설이 되다 김경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군의 전설이 되다 김경천

생애

아버지인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김정우가 만학의 나이에 큰 아들 성은과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김정우는 동경 공업학교를, 김성은은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고급장교가 되었다. 김경천은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 중앙 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입학한다.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 책을 탐독하던 그는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유년학교를 마친 후 1909년 12월 1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김현충(金顯忠)이고, 일본군에 근무할 때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하여 호적에 올라 있다. 후에 신팔 균(신동천),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

그가 일본 유학중인 1910년 초에 아버지의 별실(別室) 화순(和順) 집이 부친 소유 동대문 등지의 채전(菜田)을 전군 부대신(前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에 위탁하여 상당 금액을 받고 매각하여, 김정우의 며느리(李召史)가 윤 씨에게 진정서를 내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난 것으로 보아 부친의 유산을 두고 집안에 다툼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부친 김정우는 군부대신 윤웅렬의 부관을 지냈다고 한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앞서 1908년 3월 중 아버지 김정우가 작고하였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08년 7월말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자신의 재산인 전답, 가옥, 산판(山坂)을 나열하고,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文券)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내었다. 당시 재산 목록을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성부로 소환되어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다사케와 면담하였다. 테라우치한테 임관 권고를 받은 김경천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가정 생계도 꾸려나가야 했고,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육사 졸업한 것 갖고는 안 된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여 일본 군사기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1909년 5월 육군 중앙 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8기)하였다. 이어 1911년 5월 27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면 바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그는 소위 임관을 처음에 거부하여 말썽이 되었다.

이후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 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 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 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1년에는 수청(水淸)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공민(公民)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이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 견문기(露領見聞記)"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이후 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 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장 김규면(金圭冕, 1880-1969)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의 온갖 수단을 강구한 김경천 매장 공작과 중국인과의 외부적 문제, 한국인끼리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하던 중 그는 신흥 무관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은 육사 삼 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에 위치해 있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상룡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놓은 신흥 무관학교에 갔다. 일본 육사 출신 김경천, 이청천이 그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들어가자 3.1 운동 이후 독립군이 되려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삼원포로 갔다.

1925년 6월에 부인 유정(柳貞, 1892-1971)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져 종로서에서 수색중이라고 시대일보가 보도하였으므로 이때 연해주로 가서 가족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수범은 이듬해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 고려 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 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 이중 집(李仲執))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운동의 선도 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된다.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한다.

김경천은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는 2012년 12월 06일자 KBS 역사스페셜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에서도 밝혀진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 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2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는 이르쿠르츠 파, 상해파 둘로 나뉘었는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 중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을 수 있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 노동수 감소 8년형을 언도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 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말년 소식은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자유신문은 망명 지사 가족 탐방 기사를 연재하는데, 그의 가족은 당시 국내에 없었으므로 5번째 기사로 그가 살던 종로구 사직동을 찾아 동네 노인을 만나 그에 대한 옛이야기를 듣고 보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사후

특히 김경천은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일찍부터 '장군'으로 불린 인물이기에, 김일성이 그의 이러한 명성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교로서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홀연히 망명한 뒤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리며 유명했던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1945년 12월에 간행된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 진상(朝鮮眞相)』에도 북한 김일성은 김광서(金光瑞, 金擎天) 장군의 명의를 상속 중이라 한다고 했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로 알려지면서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행적을 기록한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 실기 약초(固軒實記畧抄)』에 김경천(金擎天)은 김일성(金日成)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 1888~1969)은 1918~1922년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때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김경천이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윤치성은 김광서가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하였다고 한다. 김광서의 부친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육군 공병 참령(工兵 參領)으로, 윤치영의 백부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부관(副官)을 지냈다고 하므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윤치영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윤웅렬의 아들이자 윤치영의 4촌형인 윤치호(尹致昊, 1864~1945)의 영문 일기 1920년 1월 22일 자에는 김광서(金光瑞) 군이 몇 달 전 북부지역으로 떠났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윤치영(尹致暎, 1898~1996)도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고 하였다. 김광서는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 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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