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은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유사과학입니다(2)

창조과학은 기독교 교리가 아니라, 유사과학입니다(2)

안녕하세요. 퀘리스천입니다.

오늘은 어제 글에 이어서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창세기 1장의 창조론의 여러 종류를 살펴보며,

그동안 기독교를 향해 가졌던 오해들을

조금씩 풀어보겠습니다.

1. 문자적 해석이 무엇이 문제인가?

창조과학를 따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문자적 해석'입니다.

이런 반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게

당연히 옳은 거 아니냐, 그게 뭐가 문제냐?'

맞습니다.

문자 그대로, 텍스트 그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문자'는

성경이 원래 기록되었던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가 아닌

'번역된 한글'입니다.

번역은 '반역'이기도 하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 때문에 원문이 훼손당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번역이 가장 원본에 가까운지를

비교하고 따져보면서 읽는 게 좋습니다.

성경은 한글로만 번역되었나요?

아닙니다.

수백, 수천 개의 나라의 언어로 번역됐습니다.

한글 성경은 중국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고,

영어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고,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영향을 받기도 했죠.

그러나 시간적 한계, 공간적 한계 때문에

한글성경만 읽어서는 원뜻을 다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창조과학식의 문자적 해석의 가장 큰 문제는

'현대의 사상이나 세계관을 고대의 성경에 주입'

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질문 공세가 시작되자,

'아니다, 우리도 충분히 합리적, 과학적이다'

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다가,

성경 원문이 원래 의도했던 것을 놓쳐 버린 겁니다.

진짜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하려면

1)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원문을 연구해야 합니다.

2)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단어의 원뜻을 알아야 합니다.

3) 문법적구조, 문학적 장르르 파악해야 합니다.

4) 가족, 경제, 주종, 군신관계 등 역사적 배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창조과학회에서는 이 모든 걸 무시합니다.

신천지도 무시하더군요.

그러나 진정한 문자적 해석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전통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물론 2000년 역사 동안 활동했던

모든 목회자, 신학자들의 책을 다 읽을 순 없겠죠.

하지만 본인이 가장 올바르게 여기는 학파의

주된 관점을 공부해서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2000년씩이나 연구된 그 책에서

'이 해석은 나밖에 몰라,

그 누구도 발견 못한 유일한 발견이야!'

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도 아니죠.

겸손한 마음으로

'내가 오늘 발견한 새로운 해석이

이미 과거에 존재했을 수 있어.

또, 내가 잘못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이미 500년전에 반박당했을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태도로 해석해야 합니다.

2. 진화를 긍정한 창조론 3가지

제가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기독교 밖 사람들 뿐 아니라

기독교 내부 사람들 마저도

'창조론' 하면 '젊은지구론(지구 나이 6천년)'

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신학계에서 유통되는 굵직굵직한

이론들만 정리해도 5-6가지가 넘습니다.

먼저 진화적 창조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화라는 자연법칙을 사용해서

우주와 지구와 생물계를 창조하셨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에도 3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 비목적론적 진화창조

하나님은 우주가 스스로 진화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갖게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골프로 비유를 해 볼까요?

하나님이 직접 골프공을 제작하셨습니다.

아이언샷을 때려서 '패러웨이'에 공을 떨구었지만,

공이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공이 어디로 굴러가든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죠.

즉, 창조를 '자연의 진화법칙'에 완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개입은 '최소화'했다는 입장입니다.

둘째, 계획된 진화창조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진화과정을 작동시킴으로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공을 만드시고, 굴리시긴 했지만,

전혀 공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홀'에 골인 하게 된 겁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창조를 '자연의 진화법칙에' 맡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 맞았다는 거죠.

셋째, 인도된 진화창조

하나님이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진화라는 자연법칙과 기적을 통해 개입하셨다는 겁니다.

공을 제작하시고, 아이언샷으로 크게 때리셨는데,

공이 코스를 벗어나려고 할 때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심으로 '홀' 까지 공이 안착하게 하셨다는

입장이죠.

즉,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되

'진화' 같은 자연법칙을 최소화하시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해 오셨다는 겁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면 '진화'라는 단어가

'창조'라는 단어에 너무 가까이 붙어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화' 와 '진화주의'는 다르기 때문에

어느 쪽을 얼마만큼 취하느냐에 따라

신앙과 과학에 대한 태도가 달라 질수도 있지만요.

3. 진화를 부정한 창조론 2가지

이제는 진화과정을 건너 뛴 채

과학의 내용들을 성경에 본문과

조화시키며 해석한 이론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론들은

창세기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라는 과학적 입장을

함께 조화시키려는 입장들입니다.

첫째, 간격 이론

이 이론은 창세기 1장 1절-2절 사이에

수십 억 년된 지질 시대가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절의 '창조하시니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바라'는 카탈형 완료형 동사인데,

이 동사는 1절에서 처음의 창조가 끝났고,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수식업년의 세월동안 어떤 재앙이 일어난 것으로

해석합니다.

안타깝게도 이 이론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아직 '히브리 문학 양식'에 대한 연구가

미비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가 '완료형'으로 처음에 등장하는 것을

무조건 '과거에 있었던 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했던 겁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잘못된 문자적 해석'이죠.

나중에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히브리어 문학에서 맨 처음에

'카탈형 완료형 동사'는

'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문학적인 틀, 관용적인 문구로

사용된다는 게 정설로 밝혀졌습니다.

1절에서 '완료형' 동사가 나왔다는 것 하나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는

모든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3절부터 나오는 창조의 과정은

'다시 창조, 제2의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3절부터 나오는 창조의 순서들이

결국 '젊은지구론'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죠.

둘째, 날-시대 이론

간격 이론이 '히브리어'를 단순하게 해석해서

잘못된 문자적 해석의 오류게 빠졌었다면,

날-시대 이론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6일들이,

24시간씩 흘러가는 '하루'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사용된 단어 '날'은

히브리어로 '욤'인데,

이 단어가 구약의 다른 문맥에서는

'긴 기간, 오랜 세월, 한 시대'로

사용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처음 세상이 창조될 때에는

인간이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에서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루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24시간의 하루일 필요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는 분명히

해가 뜨고 지는 것이 하루의 기준이라고 말하는데

정작 태양은 넷째날에 창조됩니다.

그러니 첫째날부터 셋째날까지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하루를 계산할 수가 없는거죠.

날-시대 이론보다는

훨씬 더 히브리어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아들어가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6일 동안 만들어진 '창조의 순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 것이죠.

만약, 6일이 6만년, 6억년이라고 하죠

아니 하루를 7억년씩, 42억년이라고 해보죠.

물론 모든 '하루'가 꼭 같은 기간일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면,

풀과 열매맺는 나무들은 셋째날에 창조되었고,

태양은 넷째날에 창조되었는데

태양이 생길 때까지

풀과 나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식물이 살아남으려면 '수정'의

과정이 필요한데,

화분의 수정을 돕는 곤충, 씨앗을 퍼뜨려 준 동물들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 식물들이 자라나서

나중에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키는

선악과 같은 나무로 성장하게 된 걸까요?

미스테리합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과학과 조화시키려고 한다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게 '창조의 순서'

라는 것을요.

땅의 식물들이 만들어진 날과

곤충, 새, 동물들이 만들어진 날이

다르다면, 수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 (위에서 아래로) 현대 과학이 밝혀낸 순서 (위에서 아래로) 빛 별 궁창(하늘), 바다 태양 땅, 채소, 나무 지구, 바다 해, 달, 별 바다 바다 생물 바다 생물 새 씨 맺지 않는 식물 땅의 짐승 육지 동물 공룡 포유 동물 열매맺는 식물

4. 대안을 찾아서

자, 그러면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할까요?

창세기 1장의 창조론을 믿고

과학을 평생 무시하며 살래?

아니면

과학이 얘기한 빅뱅이론, 지구 나이 46억을 믿고

평생 하나님도, 성경도 무시하며 살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맞았으니, 너는 틀렸다.

둘 중 하나만 완벽한 정답이다'

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행히도 창세기, 창조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서

절망의 양자택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규모있는 신학교에서도,

그 신학교를 나온 교단의 목회자들도

이제는 앞서 소개한 창조론을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제부터 제가 소개할

점진적 창조론 또는 문학적 구조론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점진적 창조론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버나드 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분의 질문은 이겁니다.

"우리는 뉴턴, 아인슈타인 이후의 사람이라서

과학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하려하지만

과연 수천년 전 히브리인들, 모세, 이스라엘이

우리와 같은 생각으로 성경을 쓰고 읽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라는 겁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계시문서다!

여기서부터 창조론을 다시 세우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과학적 과정이나 순서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알려주기 위해 기록된 문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의 가치관, 세계관에 맞게

창조를 6일 동안 그림 그리듯 보여준 것이죠.

위의 사진을 보시죠.

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관입니다.

여기에 맞춰서 창세기를 읽으면

창세기 1장의 묘사가 전부 이해됩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 위에 '궁창'이라는 공간이 있고,

궁창에 있는 물들이 쏟아지는 게 '비'라고 생각했죠.

하늘은 3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1) 일상적으로 숨을 쉴 수 있는 대기권

2) 물을 한가득 담고 있는 궁창

3) 궁창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더 높은 하늘

그래서 솔로몬도, 바울도

'삼층천'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저는 물어보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우주여행 다녀오신

리처드 브랜슨 회장님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의장님

우주로 날아가실 때 '궁창'에서

물 한 바가지 뒤집어 쓰셨었나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순서, 묘사들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 맞추어

그림 언어로 창조를 묘사해준 것이지

문자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겁니다.

5. 창조과학의 아버지와 계보

물론 창조과학의 아버지인 '헨리 모리스'는

문자 그대로 창세기와 종말론을 해석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창조과학회' 와 '세대주의 종말론'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세대주의 종말론'은

성경의 예언한 사실을

우리 현실의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는 해괴한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유로 연합이 적그리스도라고 얘기했었고,

666, 베리칩, 같은 표시를

오른쪽 손목이나 이마에 받으면

지옥으로 하이패스 직행한다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일단 헨리 모리스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종말'이 오면

그 이전의 세상으로 '완벽히' 회복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만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 하겠지요.

그런데

"노아 홍수 이전의 있던

궁창의 물이 다시 회복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대류권과 성층권 어느 중간 지점에

'궁창'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 너무 많이 비가 내려서,

궁창의 물이 바닥났다는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 7년 대환난의 기간이 끝나면

바다의 물이 다 수증기로 증발해서

다시 궁창이라는 '물 탱크'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아, 또 묻고 싶네요.

노아의 홍수 때 궁창의 물이 다 바닥났으면

작년에는 왜 그리 오랫동안 장마가 내렸냐고...

어쨋든 헨리 모리스는

바다의 물이 증발해서 위로 올라가면

궁창이라는 공간에 갇히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요한계시록 7장과 11장에 나오는

'천사'를 실제로 지구의 네 모퉁이를 잡고 있는

천사라고 해석한다는 겁니다.

네 천사들이 지구의 네 모퉁이를 잡고 있으면

절대로 궁창의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한다는 거죠.

아, 이건 항해를 떠나기 전 마젤란을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마젤란은 지구가 '네모'난 모양일거라고 생각해

너무 멀리 나가면 절벽으로 떨어진다고 믿었죠.

천사들이 지구의 네 모퉁이를 붙잡고 있다는 발상,

역시 같은 방식의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3장이나 마태복음 24-26장에 나오는

종말때의 대환난을

실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에 대입합니다.

1차 세계대전,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중국과 일본에서 있었던 지진!

이 모든 게 종말의 징조였다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또 미래에서 와서 얘기해드리네요.

코로나19 는요?

그 어느때보다 재앙과 재난으로 가득한 지금은요?

어떤 재난현상 하나만 가지고

'우주의 종말이 왔다'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미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진짜 성경을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모리스의 역대급 발언

'러시아'가 있습니다.

종말이 되면 러시아와 중동국가가 손잡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게 된다고 말했죠.

왜요?

구약성경 에스겔서 37-38장에

'곡과 마곡의 전쟁'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곡'이라는 왕이 '로스'라는 나라의 왕입니다.

모든 나라들을 집어삼키는 악마죠.

근데 '로스'를 빨리 반복해서 읽어보세요.

'로스,로싀, 로시, 러싀, 러시으, 러시아!'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로스'가 러시아랍니다.

제가 지어낸 말 절대 아니구요.

이분이 학문적으로 쓰신 책에 그대로 나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사람들이 나오게 된 걸까요?

창조과학의 아버지 '헨리 모리스'가 나오게 된

뿌리를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다윈 시대 이후에

과학자들, 성직자들 중에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이때 '엘라라 로드' 와 '데이비드 로드'라는

두 형제가 유일하게 문자주의 해석을 따르는

홍수지질학과 지구 나이 6천년설을 주장하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새대주의 전천년설' 신봉자들이었죠.

이들이 쓴 책은

제7일 안식일교의 대표적인 대학인

'배틀크릭 대학'의 지질학 교과서로 사용됩니다.

이 대학교를 졸업한 안식일교회의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라는 분이

나중에 '홍수지질학'을 정리하죠.

그래서 나온 책이 <새로운 지질학>입니다.

나중에 이 책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아서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간증'한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헨리 모리스>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창조과학의 아버지가 되죠.

저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전부 이해했다고 믿는 교만함은

신이 주신 초월적 계시마저 무시한다'

는 것입니다.

창조과학, 세대주의, 신천지

다 똑같습니다.

나이아가랴 폭포수의 물을

50ml 짜리 종이컵에 겨우 담아놓고

그게 전부인 것처럼 믿고 떠드는 겁니다.

7. 새로운 관점들을 주창한 학자들

이제부터는 건강한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창조론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핵심 메시지는

창조과정의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이 세상, 우주의 왕으로서 명령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조가 일어나는 6일 동안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되니라' 와 같은 실행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와 같은 평가 보고

계속 반복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고대근동 주변나라들의

창조기사와 완전히 다릅니다.

<에누마 엘리쉬>라는 바벨론의 창조 기사에서는

마르둑과 티아맛이라는 두 신이 서로 싸우고

패배한 티아맛의 피를 흙과 버무려

인간을 만들었고,

그 인간에게는 신들이 하기 귀찮은

허드렛일을 맡김으로써

'노예'로 부려 먹었다는 내용이 나오죠.(ANET)

그러나 창세기 1장은 다릅니다.

감시 하나님께 대항하는 라이벌도,

여러 신들끼리 아귀다툼하는 갈등도 없습니다.

오로지 절대적인 왕으로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고대 근동의 다른 신하고는

차원이 다른 절대 지존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죠.

6일 창조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지으셨는지를,

가장 늦게 만들어진 인간을 통해 드러냅니다.

창 1:26-28이 핵심이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세상을

선하게 다스리라는 겁니다.

'형상(데무트+첼렘)' 이라는 단어는

눈에 보이는 외형이 아닙니다.

'왕의 대리자'라는 관용어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을 선하게 공정하게

아름답게 다스리는 존재로 세워주셨다는 겁니다.

[창조기사 논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 존 콜린스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며

그 이후에는 그 창조가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줄거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바라'라는

히브리어는 '카탈형 완료형' 동사인데,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전의 배경'을

말해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창세기 1장 1절에서 창조가 '끝났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태서

[최초의 7일]이라는 책에서 저자 존 레녹스는

여기에 동의합니다.

신기하게도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도,

창조의 완성은 1장 1절에서 끝났고,

거기에 대한 자세한 묘사로서

3절 이후에 6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고대 히브리인들의 입장에서 서술했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6일을 24시간의 '하루'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실제로 '영'으로 존재하는 '신'이

손이나 발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인간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상황에 맞게 적응시켜 준 문구입니다.

따라서 '하루'라는 날 역시 인간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굳이 24시간이라는 틀에 끼워맞출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6일 + 안식일로 이루어진 창조의 시간들을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노동 기간을 비유적으로

제시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고, 레녹스는 주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존 월튼의 관점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를 [우주적 성전 건축]으로

이해했습니다.

이사야 66장에서도

'하늘 보좌' 와 '땅 발등상'이 나오는데,

하늘과 땅 모두가 하나님의 '신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주 성전에 취임하시는 날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취임식을 거행합니다.

그때 성전의 각 기능들이 결정되고,

제사장들은 임무를 부여받고,

신은 성소에서 안식을 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창세기 1장에도 대입해보면,

첫째날~셋째날과

넷째날~여섯째날에 창조된 피조물들이

서로 다른 기능을 부여받았다는 걸 알 수 있죠.

마지막으로 아담과 하와를 '제사장'으로서

우주의 성전인 에덴 동산을 섬기도록 임무를 부여합니다.

브루스 월키 <창세기 주석>

낭만닥터 김사부가 3보드 의사라고 해서

엄청난 재능을 뽑냈듯이,

신학계에서도

신학 박사와 물리학 박사로 동시에

대활약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의 책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에서는

창조가 '그 순간' 다 완성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자라갈 것'까지

포함시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씨앗'처럼

나중에 때가되면 만들어질 것들도 포함시킨거죠.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와 과학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접점이 생기는 겁니다.

콘웨이 모리스라는 고생물학자는

'진화의 경로는 많지만

진화가 다다르는 종착지는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과 우주 바깥의 지적인 존재의 계획이

스며들어 있을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한거죠.

에른스트 마이어라는 생물학자는

'자연에는 목표지점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활동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라면서,

모든 생명체는 '목적'을 지향하도록

설계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창조라는 개념을 꼭 단 번에

끝난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라고 했지요.

신앙을 선택하고 과학을 포기할까

과학을 선택하고 신앙을 포기할까

이런 이분법에서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당신,

만약 그런 분이 계시다면 아주 좋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절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이 맞는지 끝없이 고민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자연을 일반 계시라고 부르고

성경을 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우리는 하나님이 두 계시를 기록한 저자이시기 때문에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할 수 없다고 믿는다.

과학은 자연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며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만일 이 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둘 중 하나, 혹은 모두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모순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자연과 성경은 서로 충돌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한쪽을 무시하기보다는

언젠가는 하나님이 드러내신 근본적인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

자연과 성경 모두를 탐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 데보라, 로렌 하스마 <오리진> 중에서-

from http://queristian.tistory.com/21 by ccl(A) rewrite - 2021-07-30 1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