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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PART 2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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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기를 분명히 설명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이제는 내가 무엇을 원했던 건지 안다. 내가 원한 것은 오직 구석만이 즐길 수 있는, 아늑함과 경이감, 좁음과 광활함, 안정과 모험 사이의 절묘한 조화였다.
나는 지금도 구석이 좋다. 나는 밀실 공포증의 반대 격인 질환을 앓고 있다 ((앓는다는 말이 적당한 표현이라면). 나는 좁은 공간에 이끌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일본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인만큼 좁은 공간에 사는 사람은 없다. 구석 인간들이다. 이들은 지하철 칸과 술집과 호텔방이라 주장하는 공간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놀랍게도, 그 와중에 누구도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첫 페이지를 펼친다. <배겟머리 서책>은 개인의 일기처럼 보이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게, 진짜로 개인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저자인 세이 쇼나곤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내가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읽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이 쇼나곤의 글을 그토록 재미나게 읽는 이유다. 세이 쇼나곤은 보통 익명의 저자나 죽어가는 저작에게서나 나타나는 투명한 솔직함으로 <배겟머리 서책>을 썼다.
배게를 고쳐 베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점 쇼나곤의 세상에 빨려 들어간다. 그녀의 대담함에, 소소한 것들을 향한 사랑에, 뜻밖의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에 매료된다.
“배겟머리 서책”이라는 제목은 미스터리다. 왜 배개지? 어쩌면 쇼나곤은 베개처럼 침대 밑에 원고를 두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쇼나곤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게에서 위안을 찾듯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었을지 모른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배겟머리 서책>은 적어도 전통적 의미에서는 책이 아니다.
서술의 맥락도,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도, 심오한 주제도 없다.
<배겟머리 서책>은 크고 (대게는) 작은 관찰을 섞은 잠발라야 (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쌀과 볶다가 육수를 붓고 끓이는 미국 남부의 요리 - 옮긴이)다. 마쿠라노소시, 즉 <배겟머리 서책>을 영어로 옮긴 메러디스 매커니는 ““짤막한 글과 생각한 일화를 누빈 불규칙한 퀼트”라고 말한다.
책이 아닌 이 책은 297개의 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글은 한 문장에서 수 쪽까지 길이가 다양하다. 어떤 글은 교토의 황궁에서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며, 어떤 글은 그저 자기 생각에 고집스레 담은 목록에 불과하다. 그 목록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쇼나곤에게서 나와 비슷한 면을 발견한다. 목록 작성을 좋아하는 부류.
쇼나곤은 한 길에만 머무르길 거부한다. 그녀는 “세련되고 우아한 것들”에서 “가치 없는 것들”로 방향을 꺾었다가 다시 “진정으로 훌륭한 것들”로 돌아온다. 쇼나곤이 길을 잃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쇼나곤은 “붓 가는 대로 따라간다”는 뜻의 즈이 히츠를 하고 있다. 즈이히츠는 일본의 글쓰기 기법 아닌 글쓰기 기법으로, 내 눈엔 책이 아닌 책을 쓰기에 완벽한 방식으로 보인다. 즈이히츠를 실천하는 작가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 지적 가려움을 긁은 다음,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글에 부조를 부여한다기보다는 구조가 스스로 나타나게 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즈이히츠를 활용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고, 자기계발서들은 조언한다. 이런 접근법은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목적지를 파악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니 움직일 것. 지금 있는 곳에 서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 일단 붓을 들고 어디로 향하는지 지켜볼 것.
쇼나곤은 세상을 묘사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세상을 묘사한다.
중립적인 관찰은 없다. 쇼나곤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를 안다. 쇼나곤은 몇 세기 후 니체가 발전시킨 철학 이론인 관점주의를 따른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쇼나곤은 말한다. 너만의 것으로 만들어.
누군가는 이 말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의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쳐나서라고 말이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이제는 언제든지 모두가 모든 것에 자기 의견을 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친구들에게, ‘전문가’들에게, 그리고 가장 교활한 알고리즘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 결과 우리는 희뿌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의 신념은 종이처럼 얄팍하다. 당신은 새로 생긴 초밥집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별점을 다섯 개 줬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타지마할은 정말로 아름다운가? 아니면 인스타그램 속 황홀해하는 사진들을 보고 타지마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쇼나곤은 좋아하는 것 하나마다 불쾌하고 불편하고 역겨운 것, 최악으로는 짜증나기 그지없는 것이 세 가지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빨리 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찾아오는 손님,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지껄이면서 미친 사람처럼 활짝 웃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 몰래 기어 들어오는 은밀한 애인을 발견하고 짖어 대는 개. 벼룩, 말하고 있는데 불쑥 끼어들어서 잘난 체하며 자기가 이야기를 끝내는 사람(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을 끊고 끼어드는 사람은 정말 짜증 나기 그지없다). 파리들, 졸려서 막 잠자리에 누웠는데 그 가늘고 작은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모기 한 마리. 12월 31일에 하루 종일 내리는 비.”
쇼나곤은 고집스럽지만 융통성 있게 고집스럽다. 꽃이 만개한 배나무를 떠올려보자. 일본인을 배꽃이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그 남자는 배꽃처럼 얼굴이 못생겼다”처럼 사람을 모욕하는 데 썼다. 하지만 중국인은 배꽃을 사랑했다. 쇼나곤은 그러므로 “배꽃에는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과연, 깊게 생각해본 쇼나곤은 배꽃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호의를 가지고 주의 깊게 쳐다보면, 꽃잎 끝에 꽤나 사랑스러운 광채가 아주 희미나게나마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간디처럼 쇼나곤도 꽤나 까탈스러운 사람이었다. 다음 기록을 보자.
“나는 살짝 누렇게 변한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을 참을 수 없다.”
보통 이런 종류의 결벽은 나를 무척 짜증 나게 하지만, 나는 점점 쇼나곤을 이해하게 된다. 쇼나곤은 까다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민감한 사람이다.
에피쿠로스처럼 쇼나곤에게도 쾌락의 분류 체계가 있다. 쇼나곤은 그냥 즐거운 것과 진정한 오카사이, 즉 진정으로 기쁜 것을 구분한다.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진정한 기쁨에는 놀라움, 예상치 못한 전율이 있다. 또한 진정한 기쁨은 평범한 즐거움과 달리 쓰디쓴 뒷맛을 남기지 않는다. 진정한 기쁨은 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기에 사라져도 그립지 않다.
쇼나곤이 보기에는 작디작은 요소가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쇼나곤은 세 겹 부채는 좋아하지만 다섯 겹 부채는 용납하지 않는다(다섯 겹 부채는 “너무 두껍고 밑 부분이 못생겼다”). 공기 중에 눈이 올 듯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기쁘지만 “비가 올 기미로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은 그날의 분위기를 망친다.” 딱 좋아 주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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