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살고 다 죽기 vs 나만 죽고 다 살기

나만 살고 다 죽기 vs 나만 죽고 다 살기

이러한 vs 놀이는 우리의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당위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의 문제이다. 우선 전자를 선택하고 이유를 생각해 보겠다. 내는 평소에 이에 대해 깊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 그러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면 그 상황의 감정에 따라 선택 여부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때의 선택에 별다른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예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 전자를 선택하면 그 선택에 대한 막중한 짐을 지고 혼자 살아내거나 죽어야 할 것이다.

1. 나만 살고 다 죽기

죽는 대상은 인간에만 한정하자. 내가 이것을 선택한 것은 인류의 멸절을 선택한 것과 같다. 우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우주에서 인류가 절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굳이 절멸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당위적인 문제도 사실적인 문제도 없다.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가치적인 부분을 떠나서, 생존이다(생존을 존재의 목적으로 둔다기보다는,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목적이 아닌가 하는 사후 해석). 우리의 존재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있는 것이며, 우리가 없어진다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지금까지의 인과의 경로가 변경된다.

두 번째 이유는 고통의 종식이다. 물론 남아있는 비인간의 고통이 존재하지만 여기서는 인간만 고려 대상으로 하자. 분명히 이 선택은 누군가의 비고통이 무시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매개체가 상실되었으므로, 우리에게는 이제 고통을 적용시킬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 이유는 무엇에 도달할 것인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인류가 여기서 계속 발전한다고 하여, 그 방향이나 종착지, 혹은 계속 나아감이란 것이 더욱 무언가에 가까워진다고 할 수 없다. 아직까지의 인식의 한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나아감은 단지 태양계에서 부유하는 부표 같다. 내가 "도달점이 모호하면 인류의 절멸을 선택한다."라는 조건문의 전건이 참인 경우에 후건도 참임을 천명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애초에 후건의 선택의 진리치 조차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내 선택이 옳다거나 그른 이유는 없다. 그 선택에는 논리적인 조건도 없고 당위적인 가치도 없다. 중대한 결단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선택된 것이다. 이유가 있다면 그 선택을 하게끔 설정된, 나의 선택 이전의 모든 인과적 경로가 그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할 것이고 그 이유란 최소한 모든 사람의 수만큼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 번째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 인류세가 종식되고 다른 무언가가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구경하고 죽겠다.

다섯 번째 한 번 해보고 싶은 경험이라는 것이다. 만약 나의 이 선택을 모두가 알고 죽는다면 죽기 전에 삶의 미련이 있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촌각 이후에는 어떠한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고통이 남아있다면 내가 떠안은 죄책감 뿐이리라. 80억 인류의 고통을 떠안은 마지막 인류, 여기에 잠들다... 그 당시에 죄책감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세상에 나만 존재한다는 느낌도 굉장히 궁금하다. 방구석에 혼자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까? 이제 지구는 내 방구석이 된다. 어느 누구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소멸된다. 기술, 제도, 지식 등등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남긴 기록을 누군가가 알아내지 못한다면 인류의 기억은 나로 인해, 나를 마지막으로 끝난다. 단지 한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의 문명이 끝난다.

2. 나만 죽고 다 살기

나는 이것을 딱히 선택할 이유가 없다. 내가 죽는 것은 내 세계의 종식이다. 내가 아닌 세계에 미치는 파급이란 극히 미미하다. 뭔가 외계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것을 선택한다면 내가 죽은 후에 타인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라고.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는 아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이유'를 판단할 주체인 내 세계가 이미 멸실되었기 때문이다. 내 사후에 내가 아닌 세계는, 내 사후에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이것을 선택한다면

첫째는 고통의 지속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누군가는 계속 고통을 느끼고 악은 계속 증식될 것이다. 악은 허상이지만 생각보다 무지한 대다수의 사람이 점령한 지구는 악을 계속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악이 늘어난다고 해서 지구 바깥으로 큰 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뭐 지구를 넘어서는 악의 확장이 현시된다고 하여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둘째는 지성의 진보이다. 내가 알아내지 못한 다른 무언가를 미래는 알아낼 수 있을 가능성이 항존 한다. 물론 그것은 이미 없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셋 째는 다양성의 증가이다. 세상은 생성과 멸실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신기한 것이 창발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이미 부존하는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넷 째는 일말의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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