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road to ruin

Long road to ruin

현장과 조금이라도 연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알았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를 알았다고 그렇게 단정지어보는 문장. 그러나 그를 정말로 '아는' 사람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려움이 많다.

본부에 출입하는 인원이었다면 그를 모를 인간, 비인간, 누구든 그를 모를 존재가 있었을까? 미하일이라는 이름보다는 짧은 코드네임 로버, 아니면 그만한 성인 남성에게 붙여지기에 퍽 귀여운 애칭인 '미샤' 정도로 불리던. 곧잘 달고 짠 군것질거리를 들고 다니던 뱀파이어 말이지. 언뜻 느껴지는 벽이랄 것은 없이 마냥 무르고 순해서 대하기에 마음이 편하고, 때로는 좀 만만하고, 그래서 이것 좀 부탁해, 미샤...하고 찾는 일도 있었을, 또 한편으로는 그 남자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눈으로 웃을 때가 있다는 것을 그를 주의깊게 바라보던 몇몇 이들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훌쩍 위로든 옆으로든 누구에게 밀리지 않을성 싶게 큰 덩치며 둥글게 말아 묶어올린 긴 머리칼의 색이 어떤 식으로 햇살 아래에서 색을 달리하였는지, 꼼꼼히 모아 묶었음에도 하루의 끝자락엔 잔머리 종종 삐죽 튀어나온 것 눈에 들어오고는 했다던지, 푸르고 노란 빛이 넓은 바다와 그 위에 자리잡은 섬들처럼 자리한 홍채, 깊지 않게 입가 패여들던 미소 적당히 덮듯 꺼슬하게 기른 수염과 살갗 위에 몇 개 툭툭 흩어진 점들이며 하는 것들을 쓸데없이 세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으리라도 대충, 한번 마주친다면 기억에 꽤나 남을 정도의 준수한 외양, 적당한 애정과 호의 넉넉히 잡혀드는 낮은 목소리를 그 사람, 하고 기억해내지 못할 사람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 미하일 유리예비치, 그냥 미샤라고 불러. 하는 의례적인 소개를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본 적 없는 사람은? 이런, 한나. 모두가 당신처럼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니까.("갑자기 뭐라는 거에요? 나는 당신 좋아하지도 않는단 말이죠.")그래, 그래. 알아. 나도 사랑해. 자, 그러니 그런 미하일의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웠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은 사람 역시 없었다. 그렇게 단정지어보는 문장 하나로 끝을 맺는다. 첫번째 날의 거실에는 관과 비슷한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한나는 포장을 뜯고 자는 듯 누워있는 그것을 내려다 본다. 이 순간 그가 가장 명확하게 느끼는 감각은, 살아있는 매 순간마다 느껴지며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일 뿐이다. 안드로이드가 가장 먼저 그에게 건넌 말은 잘 지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지 못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노력이 들었다.

- ...반면에 UNP001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그렇게 사랑받던 그 뱀파이어와 다른 곳 없이 꼭 닮은 생김새로-어쩌면 안에 든 것도 사실 별반 차이가 없었을지도 모르게- 만들어진 갈라테이아를 아는 사람은 그를 아는 사람만큼 있었을까? 해서 그를 사랑했던 것만큼 이를 사랑했을 이들은? 하는 것을 한 사람 정도는 생각하고는 했었던 것이다. 일의 전말이야 흔한 사연들의 모임이다. 회사가 하나 있었고, 그 회사 소속의 개발자는 이 세상의 여느 인간들과 다름없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를 영원히 잃었고, 그러한 세상의 순리에 다른 인간들처럼 순응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제 삶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아주 정교한 모조품을 만들어다가는 산 자의 위로라는 라벨을 붙여 세상에 내놓으려고 했는데...쾅! 모든 게 어긋나 버렸다. 인간이 주관하지 못하는 영역에 손 댄 것 무언가를 단단히 망치고 벌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벨탑 무너지듯 그렇게 연구소가 터졌다고 한다. 그 폐허 뒤 세상에는 베타 테스트를 마친 직후 남겨진 첫번째 프로토 타입 몇몇이 남았으며 개중 하나인 그의 이름은-뭐, 적어도 모델명은 UNP001이다. 베타 테스터가 처음 설정한 호칭은 로버(rover). 하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자면 말이지, 그 갈라테이아의 이름이 아니지 않나 하고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를 기억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모두가 쉽게 잊지 못할 존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의 이름을 나중에라도 제대로 지어줄 사람은 있을까 하고-그런 생각을 오랫동안 반복하면서도 그게 누구가 되었든 제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고 그렇다. 하지만 그 첫 세대이자 마지막 세대가 되어버린 안드로이드를 포함하여-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하는 이는 하나 이상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로버라고 부르도록 할게요. 지금은요.")아니, 그래서 UNP001의 처지에 대해 찝찝함이나 불편함, 죄책감과 실수에 따르는 어색함, 외려 잘못한 측이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야 흔하디 흔한 것이며...그 정도의 감정 외로 그를 생각해 줄 사람이 몇이나 있느냐 하는 것은, 물론 우린 그런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몇 명이 얼마동안 얼마나 슬퍼해야 그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걸 당신도 이제 알겠군. ... ...시간이 지난 뒤에 이름 하나가 주어진다.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했던 것도 같다. 신의 선물은 늘 그렇게 심술궂은 면이 있는 법이다.(어떤 신화에 따르면 그의 선물들 중 상자 가장 아래에 남은 것은 희망이다. 삶을 견디는 데에 유용하겠지.)

뭔가 잘못되는 소리는 예컨데 쾅, 펑, 탕! 우드득, 콰직, 당신 아이를 가졌어...잠깐, 이건 너무 고루한가? 그리고 때로는 이런 것이다. 내 사무실로. 지금. ("혹시 안에서 전달받은 다른 사항이 있었나요?" "회수에 대한 것 말인데요. 어느 것도 확정되지 못했어요.")

남자는 적어도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은 여름이 끝나지 않는 도시에 대해 생각한다. 낮의 해 아래에서는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제대로 걸을 수 없고 밤이 되어도 공기마저 절절 끓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은 도시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두 몽유병에 시달리다 못해 매 순간 잠든 채 먹고, 사랑하고, 짐을 이고 걸어다니다가 잔뜩 열이 오른 아스팔트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매 순간 모래가 살에 쓸려 버석거려도 불평없이 새벽을 기다리던 감각을. 그러나 그런 일은 워싱턴의 도심에서 생길 것 같지 않았으며 어렴풋히 이 모든 생생함이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님을 다소 느리게 자각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UNP001이 생각하기로는 죽은 이의 기억이며 경험까지 그대로 지니도록 재현된 안드로이드가 있어야 할 곳이라면 어딘가 거칠고 험한 지형의 장소에 위치한 지하 연구소 같은게 아닐까 싶었다.(그는 "미샤라고 불러도 될까요?" 에 대한 대답에 그러지 말라는 완곡한 의사 표현을 한다. 그러나 로버 역시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그를 제외하고 진행되던 사무실 내의 대화는 여러 사람의 합창처럼 그 목소리들이 귀에 울리다 클라이맥스에서 멈춰 종래엔 내려진 결정을 거절할 수 없는 순간이 왔고, 이에 일순간 언뜻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렛 퍼지 특유의 향이 공기 중에 감돈다는 착각을 할 즈음 사람들의 대화는 엉망진창으로 끝이 난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잘려있는 테이프를 돌리는 것처럼 그런 식의 말이 계속해서 재생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되감기더라도 언제나 같은 부분에 멈춰서서는 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도록 해. 시간이 지나고 잊혀지도록 둬, 그러기 위해서는 흔적을 남겨둬서는 안된다는 것을 당신도 알지. 다시 되감긴 것을 들어볼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도록 해. 이렇게 다시 테이프가 감긴다. 다시 같은 곳에서 끊긴다. 아뇨, 모릅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파일이 손상된 것처럼. 손상된 부분 이후로는 읽어나가지 못하는 삶도 삶일까? UNP001은 한나가 그렇게 되기 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원본의 기억을 회상하고 감정을 곱씹는 것은 레플리카가 겨우 인지하기 시작한 본인의 자아를 끊임없이 흐려나가는 일이었지만 이를 멈추지는 않았다.(그가 가질 수 없는 관계들이 그 안에 있다. 한낮, 주차장 안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 빛 아래의 그는 틀림없이 웃고 있다. 한나 골드가 그런 식으로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제가 아님에도 그 순간은 제법 편안하다. 총성, 불에 데인 듯 화끈하게 올라오는 통각과 축축하게 젖어드는 팔을 부여잡고 눈을 감은 것은 제가 아님에도 그 순간은 기묘하게 편안하다. 다시 눈을 뜨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편안한 것 같아 문득 그가 부러워질 정도로. 남자는 밤마다 제것이 아닌 꿈을 꾸고 일어난다. 눈을 떠야만 한다.)

물론 UNP001의 미사용 백업 데이터에 무엇이 적혔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잘한 생각들과 의외의 감정들이 그 속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을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 당신을, 당신을, 당신을, ...(한나. 당신은? 하는 반문 없이.)마찬가지로 이것이 중요하다고 분류한 이유가 뭐지, UNP001? ...하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정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넘어가자. 대신 안드로이드가 폐기되고 남을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당신의 죽음에 대해서.(현 시간부로 프로젝트는 무기한 동결됩니다. 관련된 모든 물리적 증거들을 소거하세요.)당신은? 폐기된 뒤에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남을 리가 없어. 그 사람의 죽음과는 다르게. 나는 그래도 괜찮은걸. 당신도 아마 괜찮아질거야. 하는 대답이 들리는 것도 같아. 사실 이미 그 차 안에서 그 안드로이드는 그렇게 대답했었던 것 같고...애초 그에게 그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믿기는 했는지. 방 안을 메운 나무 조각과 규칙적인 식사 시간과 화분의 해바라기와 그 많은 양의 톱밥이 나오는 동안에도 물집도 굳은살이 박히지 않은 손과 말을 대체하듯 짓던 웃음과 시덥잖게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입 밖으로 의미없이 나오던 농담들, 겉면만을 겨우 긁어내리듯, 흔적이 남지 않는 듯 느껴지던 대화들이, 그리고, 그리고 자주 어딘가 그리워 이에 대한 열망 체념 두 상반된 감정 뒤섞인 듯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곳을 바라보고 서 저를 등진 실루엣에서 느껴지는 막막한 분위기에 숨이 턱 막혀드는 순간들에 누굴 생각했었던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여느때처럼 그와 관련된 모든 결정들은 실패로 돌아가고는 했다. 잘못을 따지자면 저 외에 누굴 탓할까? 뭔가 잘못되는 소리는 이를테면, 이를테면, 캐롤이 들린다. 여름은 진작에 끝나버렸다. 좋은 시절이었는데. 결국 휴가는 없었고 매 순간이 위태로웠지만 그래도 이제와 생각해보자면, 참 이상하게도 모든 게 그냥 멈춰버린 것처럼...("메리 크리스마스, 한나." "메리 크리스마스, 데미안.")...그렇게 멈춰 있어도 괜찮은 것 같았던 것 같아 느껴지던 기쁨, 귀먹고 눈 먼 기쁨. 그러나 침묵조차도 순간을 구제하지 못하기에 종종 그는 아무나 붙들고 애원하고 싶은 기분에 휩싸이고는 했다. 아무도-심지어 데미안조차 상실의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도와줄 수 없는 문제 하나.(당신 내가 보고 싶잖아, 그렇지? 데미안은 절대 되어줄 수 없는 미하일 유리예비치가.)

9월의 어느 날, 오후의 거실에는 해바라기 화분이 옮겨져 있다. 남자는 봉우리가 맺힌 해바라기를 보며 말한다. "당신과 새 화분도 사러 가고 싶어."

반년은 지나치게 짧았다. 그 누구에게도 충분할 수 없는 시간이라며 그렇게 치부해보는 말과 함께 망가진 끝이 온다. 그러나 사실 끝은 찾아온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거기에 그렇게 망가진 채 있었다.(그래도 나는 당신을 좋아했고, 당신이 내준 자리에 있고 싶었고, 거기는 날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욕심껏 누린 시간들이 좋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신은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할테고, 그러고서도 내가 당신 곁에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한나. 안드로이드는 데이터를 정리한다. 중요도에 따라서 어떤 기억은 삭제되고 어떤 감정은 살아남아 기계기관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일은 너무나 힘들어 심장이 거진 다 타들어간 참이다. 한나, 저기 보면 끝이 있는데 우리는 저기에 늦든 빠르든 도착할테지만, 그러는 동안 많은 게 망가지고 사라지고 꼬이고 뒤틀리며 기상천외한 방면으로 당신을 괴롭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중에서도 분명 좋았던 순간이 있었던 것 같으니 의미가 없었다고 느낄 것 까지야 없지 않겠어?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그렇게 괜찮아지고는 하잖아. 좋은 순간들을 추억하면서?)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 살면서 겪은 모든 이별과 끝에 나는 늘 이렇게 대처하고 말았어요. 한나가 말했다. 왜냐하면 길 끝에 도착한 건 나뿐이니까...

반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고, 그렇게 치부해보는 말과 함께 끝이 온다. 그러나 사실 끝은 찾아온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고 사람들이 끝을 찾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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